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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비통 역사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루이비통에서 유명한 것은 핸드백이 아니라 트렁크입니다. 클루니? 알마백? 핸드백은 잠깐 머릿속에서 지워주세요.
오늘은 루이비통의 시작, 루이비통의 역사 트렁크편을 알려드릴게요. 사실 지금의 루이비통이 되기까지 모든 것을
이 포스팅에 담고 싶지만 내용이 길어질 것 같아서 트렁크편으로 나누었습니다.
루이비통의 출생, 그리고 가출
프랑스 동부지역에서 1821년 8월 4일에 목수인 자뷔에 비통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어릴 때 부터 루이비통은 아버지를 따라 목공 기술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루이비통이 10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이후 아버지인 자뷔에는 재혼을 하였지만 새엄마가 루이비통을 모질게 대하며 구박하였고, 1835년에 결국 가출하게 됩니다. 그는 평소에 동경하던 파리를 가기로 했고, 돈이 없어 무려 2년동안 걸어서 파리에 도착하게 됩니다.
루이비통의 시작
루이비통은 아버지 밑에서 배웠던 목공기술로 트렁크제조 전문가인 무슈마레샬 밑에서 일을 배우게 됩니다. 이 때 마차와 배 운송수단을 타고 다니는 귀족들이 여행을 다니기 위하여 트렁크를 많이 이용했는데 루이비통은 이들의 짐도 싸주는 업무를 했습니다. 일명 패커(packer)라고 부릅니다.
루이비통이 짐을 잘 싼다는 소문이 귀족들 사이에 나게 되면서 이는 나폴레옹3세의 황후인 외제니의 귀까지 들어갔고, 루이비통은 그녀의 전담 패커가 됩니다. 그녀는 사치품이 많았고, 한번 입은 옷은 두번 입지 않는다 라고 할 정도로 옷과 장신구가 굉장히 많은 패셔니스타였던 그녀는 루이비통에게 내 짐을 모두 담을 수 있는 트렁크를 만들어달라 고 했고, 루이비통은 기존의 트렁크와 달리 굉장히 커다란 트렁크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루이를 전적으로 후원하게 되었고, 그 후원을 바탕으로 1854년 루이비통은 파리 카퓌신 거리에 자신의 이름을 건 트렁크 매장을 열게 됩니다. 이는 패션의 아이콘인 외제니의 트렁크를 만든 곳으로 소문이 났고 이 때 부터 루이비통의 트렁크를 사고 싶어하는 귀족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오픈런은 사실 170년 전부터 이어져 온것이죠..
루이비통의 사각트렁크
1825년에 철도가 깔리기 시작했고, 파리에도 기차가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귀족들이 기차여행을 즐기게 되었고, 기존의 트렁크는 무겁고, 윗부분이 둥글게 되어있어서 적재를 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를 보고 가죽을 빼고 캔버스 소재에 풀을 발라 무게도 줄이면서 윗부분을 평평하게 하여 사각트렁크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날 루이비통을 명품 반열에 오르게 한 최초의 사각 트렁크인 트리아농 그레이 트렁크입니다. 이 때 루이비통의 사각 트렁크가 큰 열풍이 불었고, 이를 감당하지 못한 루이비통은 1859년에 아니에르지역에 더 큰 공방을 얻어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대했습니다.
20명으로 시작했던 아니에르 공방은 1900년에 100명, 1914년에 225명이 될 정도로 엄청난 성장세가 이어졌습니다.
루이비통의 해외 진출
루이비통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지만 1870년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으로 인해 가게를 더이상 이어나갈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1871년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아니에르에 돌아왔을 땐 장비도 사라지고, 직원들도 없었지만 다시 해보자고 마음 먹게 됩니다. 1872년 귀족들이 많은 동네인 르 스크라이브 1번지에 새로운 루이비통 매장을 열었고, 이 때 루이비통은 광고지에 직원들이 영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재했었는데 이는 기존 고객들 뿐만 아니라 외국인 고객들도 확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때 가방의 디자인도 신경쓰게 되었고, 레드 스트라이프 캔버스 트렁크를 선보였는데 또 한번 유명세를 탔고, 이후 1885년에 영국 런던의 옥스퍼드 거리에 첫 해외진출을 시작으로, 뉴욕, 워싱턴 등 패션 중심거리에 매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짝퉁과의 전쟁
레드 스트라이프 캔버스 트렁크의 유행이 지속되자 다른 트렁크 가게에서 이를 똑같이 만들어 판매했습니다. 일명 루이비통 짝퉁을 만들어 판 것이죠. 그래서 루이비통 아들인 조르주 비통(이하 조르주)과 기존의 레드 스트라이프를 베이지로 바꾸면서 베이지 스트라이프 트렁크를 만들어 독점 특허까지 냈습니다. 하지만 이 마저도 다른 제조업체에서 교묘하게 모조품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렇게 1888년, 루이와 조르주는 또 한번 새로운 패턴을 만들게 되었는데 프랑스어로 체크무늬 를 뜻하는 다미에 패턴을 만들었는데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다미에 무늬의 시작입니다! 그러던 1892년 2월 27일 루이비통이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의 아들은 조르주가 루이비통을 독보적인 세계 명품 브랜드로 만들기 위해 시카고 박람회에 트렁크들을 전시하게 되었고, 이 전시로 루이비통 트렁크의 인기는 최고를 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또 다미에 패턴마저 모조품이 생겼습니다..1896년 화가 난 조르주는 아버지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아버지인 루이비통의 이니셜 'L'과
'V'를 겹친 무늬와 19세기 당시 꽃이나 식물 덩굴에서 따온 아르누보 양식이 유행했던 것을 반영하여 꽃문양이 번갈아 나열되는 모노그램이라는 패턴이 탄생했습니다. 이 무늬가 우리가 흔히 보는 모노그램 패턴입니다.
그외 흥미로운 사실
1. 지금 자물쇠가 달린 백이나 트렁크 제품은 사실 저당시 여행객들의 짐이 도둑맞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직접 자물쇠를 개발하고 전개한 것입니다.
2. 루이비통은 세일이나 아울렛이 없는데 기존 VIP고객들에게 선물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1910년부터 비매품, 즉 선물로 꽃 부케를 넣은 트렁크를 제공되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3. 루이비통에서 핸드백을 처음으로 만든 건 1901년입니다.
4. 1859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아니에르 공방은 현재 약 170명의 장인들만이 제품을 만들고 있고, 루이비통 고객의 맞춤 제작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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